최승희(1911~1969)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무용가이자 한국 최초의 무용가였다. 그녀의 예술은 극동 지역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도 알려졌으며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여 공연을 매진시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단지 “이국적인” 출신과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승희는 여행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일본과 협력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1945 년 이후 서울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최승희는 남편 안막이 향한 북한을 선택하였고, 이후 그녀의 경력은 조국과 당, 그리고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을 섬기는 데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의 개인적 찬사가 최승희를 박해로부터 지켜주지는 못하였다. 최승희의 남편은 1958 년 반국가 음모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최승희 또한 공적인 무대에서 사라져 은둔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인민 예술가’라는 칭호를 지닌 최승희는 1956 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하였으며, 이는 1950 년대에 매우 전형적으로 이루어졌던 동유럽 순회공연의 일환이었다. 이는 최승희가 우호국에서 다양한 수준의 “한국” 예술을 선보인 수많은 한국 여성 중 한 명에 불과하였음을 의미하며, 당시 현지 관객들은 그녀의 공연이 최고 수준인지 평균 이하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최승희는 자신의 예술을 정치적 목적에 활용하였으며, 그녀가 이끄는 무용단의 공연은 민속극, 드라마, 또는 한국 전쟁을 주제로 한 개별 공연 등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이 여정에는 소련에서 교육받은 무용수이자 당시 세계 청년 축제에서 투쟁하는 한국 민중의 대표자 역할을 수행하며 인기를 끌었던 딸 안성희(1931 년생)도 동행하였다. 두 무용수의 공연은 당시 언론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으나, 이들은 전형적인 일류 스타라기보다 대형 극장뿐만 아니라 외딴 지역에 있는 협동 농장의 조합원을 위해서도 춤을 추는 정치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당시 순수 무용단, 또는 음악이 결합된 예술단은 연 1 회 이상 체코슬로바키아를 교대로 방문하였다. 이는 한국만의 특권은 아니었다.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간 단체들이 있는가 하면 사진 기록만 남긴 단체들도 있었다. 조각가 티보르 바르트파이(1922~2015)는 소녀 무용수와 소년 무용수의 흉상 두 점을 제작하였는데, 당시 이들의 안내를 맡았던 한국학자 즈덴카 클뢰슬로바(1935~2023)는 조각의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다.